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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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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는 20세기 유럽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 바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켜온 것으로 잘 알려졌다. 이러한 스위스의 독자성은 영화가 대중과 사회를 변화시키고 움직이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었던 주변의 강국, 이탈리아와 독일 사이에서 자신들만의 감각과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오락물로서의 영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언제 시작되었는가?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 발명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스위스의 첫 영화상영이 1986년 제네바에서 마우리스 안드레오시에 의해서 열리게 되었다. 같은 해에 제네바의 캐시미르 시반이 자신이 직접 제작한 카메라와 38mm 프로젝터를 사용하여 촬영한 영화를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 |
| 초기 작품들
이 초기 시절에는 스위스에서 상영된 영화의 대부분이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제작된 다큐멘터리나 외국의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1901년Zurcher Sechselauten-Umzagwas라는 스위스 최초의 영화가 제작되고 1917년에는 스위스 최초의 장편영화, 에드워드 비엔스 감독의 데어 베르크퓌러가 제작된다. 그러나 이 시대 초기에는 펠릭스 매스귀치 같은 기업가들 또한 전통 포도주 생산자들의 축제기간 동안 영화촬영에 참여한다. 20년대부터 2차 세계대전 동안 스위스 영화는 꾸준한 성장을 이루었으나 다른 나라의 영화 발전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시기 주목할 만한 영화는 1930년에 제작된 최초의 발성영화, 로베르트 볼무트의 Bunzli Grossstadtabenteur이다. 이러한 꾸준한 성장은 외국 영화에 대한 수요 증가로 FOX와 같은 외국의 영화배급사가 제네바에 사무실을 여는 길을 마련해주었다. 2차 세계대전은 스위스를 고립 속에 빠뜨렸지만, 스위스로서는 오히려 이때가 창조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 된다. 이 시기 스위스에서는 정치와 문화의식을 고취하는 데 이바지하는 주제를 다룬 40여 편이 넘는 장편영화가 제작되었다. 경보병 비프 (1939), Gilberte de Courgenay (1941) and Die Missbrauchten Liebesbriefe (1940)와 같은 영화는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고 스위스 영화의 고전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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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명성 다음 30년간 스위스에서 제작되는 영화의 수는 거의 같았지만, 영화의 내용은 변화했다. 50년대에서 60년대 사이에는 애국적인 사상이나 19세기 농촌의 삶과 같은 이야기들이 영화의 주를 이루었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에는 새로운 경향의 다큐멘터리 제작방식이 생겨나 감독들과 영화제작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는데 그 중 중요한 인물들로 헨리 브란트, 월터 마르티, 알랭 태너 그리고 장뤼크 고다르가 있었으며 후자 두 명은 스위스 영화를 세계무대에 올려놓는다. 정확히 70년대 말에는 가장 성공적이 스위스 영화가 제작된다. 롤프 리시 감독의 스위스 사람 되기 (1978)라는 이 영화는 스위스 시민이 되고 싶어하는 외국인들이 겪는 어려움을 그리는 풍자 코미디이다. 80년대부터 현재까지 영화산업은 영화제작자와 프로듀서들에게 있어서 침체와 호황이 반복되는 롤러코스터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스위스 영화는 가장 큰 영예를 얻게 되는데, 바로 자비에르 콜러 감독의 희망의 여행 (1991)이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차지하게 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