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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영화 우크라이나 영화의 역사는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의 획기적인 발명이 있고 나서 몇 해 지나서 쓰여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창고에도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것과 아주 흡사한 기구로 1893년 오데사에서 만들어졌다. 그 사진작가 카르키프 A.K. 페데츠키가 우크라이나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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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영화 20세기 첫 20년 동안 우크라이나 영화는 1909년부터 카르키프에서 장편영화를 만들었던 배우 O.M. 올렉시엔코와 영화 날품팔이 여인의 사크넨코와 같은 인물들과 함께 꾸준하게 성장하게 된다. 1918년에는 키예프에 스크린아트라는 스튜디오가 세워지고 이곳의 주요 제작자로는 V. 가르딘, H. 스타포퓌, A. 룬딘이 있었다. 20년대 우크라이나 영화는 알렉산더 도브첸코의 20년대에서 30년대까지의 활동으로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와 함께 다른 주요한 감독들은 우크라이나 영화미학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시적 영화"라는 용어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운동은 소련정권의 대포로부터, 그리고 당시 유명했던 사회적 사실주의 주제의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들의 영화로부터 우크라이나 영화를 돋보이게 하려 했던 움직임이었음이 분명하다. |
| 황금기
우크라이나 영화에서 도브첸코의 우위는 20년이 넘게 지속하였고 1957년 키예프 필름 스튜디오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지면서 영화산업 발전에 대한 그의 귀중한 활동들이 알려지게 된다. 60~70년대까지 영화 산업은 예전만큼 크게 번영하지 못하고 출품되는 작품들도 전에는 본 적이 없는 수준까지 떨어지고 만다. 하지만 이 60년대와 70년대는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으며 이 시기를 우크라이나 영화의 황금기라 불리게 만든다. 이 시기가 세상에 주었던 수많은 걸작으로는 보리스 이브첸코의 타라스 셰브첸코, 이고르 사브첸코의 잃어버린 편지 (1973), 그리고 도브첸코 필름 스튜이오에서 제작된 레오니드 오시카의 위험한 9월 (1976)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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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영화제작 20세기 말, 소련의 붕괴 후 우크라이나 영화도 구소련의 나라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영화제작에 필요한 국가재정은 거의 사라지고 영화 배급 시스템도 해체되고 만다. 오직 몇몇 영화들만이 제작되었으며 그중에서 실질적으로 영화관에서 개봉되었던 영화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이 시기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될 수 있었던 2부작 서사 영화 헤치만 마제파를 위한 기도 (2002)가 가장 주요한 영화였다. 또한, 보그단 스투프카 같은 배우들은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다른 동유럽에서도 명성을 얻으며 국제적인 스타가 되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