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영화

폴란드 영화

대표적 인물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있었던 폴란드 영화산업의 디아스포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영화는 유럽과 세계무대에서 큰 공헌을 한 것은 아주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세기 후반, 열성적인 폴란드 발명가 카지미에쉬 프로쉰스키는 영화촬영이 가능한 카메라 발명에 뛰어들었다. 플레오그라프라 불리는 이 새로운 장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뤼미에르 형제의 영사기보다 먼저 발명이 되었다. 그리하여 1902년에 폴란드 최초의 영화 스케이팅 링크 인더 로열 베스 (1902)가 프로쉰스키에 의해 제작된다.

20세기 초의 가장 유명한 영화제작자 중 한 사람은 러시아와 라트비아에서의 성공 후에도 자신이 폴란드인임을 항상 자랑스러워하던 블라디슬라프 스트레비치 감독으로, 카메라맨의 복수 (1912), 곤충들의 크리스마스 (1913), 그리고 프랑스에 유배되었을 때 제작한 여우 이야기 (1913)와 같은 작품으로 나라가 겪고 있었던 사회적 문제들을 영화에 잘 반영하였다.

Dybuk

전쟁과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폴란드인들은 오랫동안 염원해온 독립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의 정신도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진 국내 영화로 인해 영화에 그리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이 시기 가장 주목할만한 작품들이 유대인 영화제작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는데 그중에는 양대 전쟁 시기에 폴란드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사한 조셉 그린과 마이클 바진스키의 영화 재즈 싱어 (1939)와 디벅 (1937)이 있다.

나치의 점령과 2차 세계대전이 남기고 간 참혹한 파괴로, 전쟁이 끝난 후 공산주의 영향 아래 오직 소련 정부의 지원을 받았던 폴란드 영화는 도탄에 빠지게 된다. 이리하여 잘 알려진 공산주의 선전을 위한 영화지원으로 알렉산더 포드 - 붉은 군대에 지원한 열정적인 공산주의자 – 와 같은 감독은 바르스카 거리의 다섯 소년 (1954)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사회적 사실주의가 최고조에 있을 무렵, 폴란드 영화 별자리에 또 하나의 스타가 탄생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안제이 바이다로 세대 (1954)와 같은 영화로 공산주의의 사상을 비아냥거리고 민족주의 영화 재와 다이아몬드 (1958)로 틀에 박힌 고정관념을 깨려 노력했다. 70년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바이다 감독은 논란이 되었던 영화 대리석의 사나이 (1977)와 철의 사나이 (1981)이라는 작품으로 폴란드 영화에 대변혁을 일으키게 된다.

디아스포라의 아들

전쟁의 결과는 경제뿐만 아니라 폴란드 예술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고 많은 영화 제작자들이 외국에서의 자유로운 영화제작을 위해 이민을 하기 시작한다. 의심의 여지 없이 물속의 칼 (1962)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폴란드와 세계를 놀라게 한 로만 폴란스키가 이 당시 가장 유명했던 감독이다.

폴란스키의 주요 작품으로는 로즈마리의 아기 (1968), 차이나타운 (1974), 피아니스트 (2002) 그리고 최근 성공작, 유령 작가(2010) 등이 있다.

   

Roman Polanski

The Debt

최근

최근 수십 년간, 줄리우스 마출스키와 마렉 코테르스키와 같은 감독들은 영화 킬러 (1997)와 같은 영화로 많은 영화제에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폴란드 영화사에서 또 하나의 빼놓을 수 없는 영화는 크지슈토프 크라우제 감독의 빚 (1999)으로 박스오피스에서 크게 흥행을 하며 블록버스터 영화가 되었다. 최근 세계화에 힘입어 예르지 카발레로비치와 개빈 후드와 같은 감독들이 유럽에서 아주 유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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